샤토에서의 점심식사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델리 겸 카페인 ‘에비뉴 원(Avenue 1)’과 강북 최고의 프랑스 레스토랑이라는 찬사를 받는 ‘라브리(L’abri)’. 이 레스토랑들을 운영하는 서울에프앤비의 권은수 이사가 한 달간 프랑스 출장을 다녀왔다. 남다른 안목을 지닌 그녀가 매거진「S」 독자에게 수줍게 전하는 샤토에서의 특별한 시간.


풍요롭고 여유로운 샤토의 첫인상


샤토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것은 넓게 펼쳐진 잔디 정원이었다. 그 너머로 또 다른 포도밭이 보였다. 어느 포도밭에서도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포도밭은 자연이 주는 햇살과 양분과 바람만으로도 좋은 열매를 충분히 맺을 수 있다는 듯이, 마치 사람의 손길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프랑스 곳곳을 돌며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연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만큼 풍요롭고 여유있어 보였다.


정성으로 빚어낸 개성 강한 와인 시음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샤토 펠랑 세귀르의 홍보 책임자 조지안 이멜베르제르(Josiane Himmelberger)였다. 그녀는 우리를 비를 몰아내고 햇빛을 가져온 고마운 손님이라며 빠르고 힘찬 프랑스어로 환영했다. 검은 스커트 정장에, 금발 머리, 눈에 띄는 장신구를 한 조지안은 겉으로 보기에도 힘이 넘칠 뿐 아니라 활달하고 거침없어 보였다. 조지안이 준비해놓은 와인은 샤토 펠랑 세귀르 2004, 2005, 2006년 빈티지 세 가지였다. 그녀는 오래된 빈티지부터 시음을 권하는 일반적인 방법 대신 2006년 빈티지를 먼저 권해주었다. 아직 3~4년은 더 기다려야 제 맛이 나겠지만 숙성된 후 그 맛이 어떻게 변할까 기대되는 와인이라고 했다. 샤토 펠랑 세귀르는 역시 생테스테프 지역의 대표 와인다웠다. 입 안에서 처음 만난 와인은 힘이 넘쳤다. 연이어 가장 많이 팔렸다는 2004년 빈티지를 시음했다. 2006년에 비해 힘은 덜했지만 나름대로 균형이 잘 잡힌 와인이었다.


2005년은 날씨가 덥고 건조해 포도 재배에 가장 이상적인 기후를 보인 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개성을 지닌 와인이 탄생할지 조지안 자신도 사뭇 궁금하다고 했다. 기후 조건이나 수확 시기 등에 따라 포도의 품질이 달라지고 거기에 따라 와인의 품질도 달라진다지만 최상의 기후에서 잘 자란 포도가 아닐지라도 어떤 품종과 어떤 비율로 섞이는지를 잘 찾아낸다면 특별한 개성을 지닌 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좋은 빈티지란 다른 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해의 개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지안은 그렇게 ‘좋은 빈티지’에 대한 내 생각을 자연스럽게 바꿔주었다.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면서도 서로 비교하지 않고 그 빈티지의 개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최초의 시도였다.


자신을 가꿔준 주인을 닮는 술, 와인


시음장을 나온 우리는 샤토의 전속 셰프가 준비한 특별한 점심 메뉴를 대접 받았다. 응접실에서 1998년 빈티지의 샴페인 포머리 퀴베 루이스(Pommery Cvee Louise)에 몇 가지 앙증맞은 카나페를 곁들여 자연스러운 담소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샤토들과는 달리 샤토 펠랑 세귀르는 샤토의 주인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참의 담소와 더불어 샴페인을 다 비운 우리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샤토의 전속 셰프 브로드 프레드릭(M. Braud Frederic)은 그들의 와인인 샤토 펠랑 세귀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을 개발해 샤토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접하고 샤토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나 바에 자문하는 일을 주로 한다고 했다. 사실 와인은 술 자체로서의 매력도 좋지만 음식에 곁들여 마시면 훨씬 풍부한 개성을 드러낸다. 와인 자체의 맛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어도, 특정한 음식과 어우러졌을 때는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때가 종종 있다. 푸아그라와 양갈비, 그리고 디저트로 나온 오페라까지 모든 음식이 다 훌륭했다. 식사와 함께 마셨던 샤토 펠랑 세귀르 2001년, 1996년, 1990년 빈티지 와인도 음식과 더없이 훌륭하게 어울렸다. 샤토의 활기찬 안내인 조지안의 매력과 마음에서 우러난 환대에 이미 넋이 나간 우리 일행에게 그보다 더 훌륭한 만찬은 있을 수 없었다.


디저트가 끝나자 조지안은 우리에게 다시 특별한 제안을 했다. 보유하고 있는 샤토 펠랑 세귀르 와인 리스트를 주면서 그중 마음에 드는 빈티지 하나를 고르면 디저트 와인으로 선물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의논 끝에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7년 빈티지를 골랐으나, 조지안은 그보다는 1982년 빈티지가 훨씬 특별한 와인이라며 오히려 그것을 권했다. 조지안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딴 1982년 빈티지는 그전 시음장에서 마신 와인이나, 식사에 곁들여진 와인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개성이 있었다. 충분히 숙성되어서 그런지 맛과 향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무엇인지 모르게 샤토 펠랑 세귀르에 대한 인상을 다소 흔드는 것이 있었다. 조지안이 내게 지금까지 마신 샤토 펠랑 세귀르 와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빈티지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 마신 와인은 분명 서로 다른 와인이면서도 일관된 개성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마신 82년 빈티지는 느낌이 다르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조지안은 놀라며 82년에 샤토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했다. 시음장에서 샤토 펠랑 세귀르 와인과 조지안의 첫인상이 묘하게 겹쳐지던 것이 떠올랐다. 와인은 자신을 가꾸고 익히는 사람을 닮은 술이 분명했다.


샤토와 교감하면 와인이 말을 걸어온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진한 커피를 마시고 디제스티프로 코냑을 마시기까지 우리의 식사는 네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그때까지 그 황홀한 음식을 준비해준 셰프의 얼굴이 궁금했다. 순박한 시골 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응접실로 나온 셰프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음식 맛을 내는 데는 그의 미소가 틀림없이 한몫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무더위에 짧은 소낙비를 맞은 것처럼 시원한 샤토 펠랑 세귀르의 방문은 그렇게 끝났다. 포도밭 어귀를 벗어날 때쯤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던 소낙비가 완전히 개고, 비구름이 물러간 새파란 하늘이 웃고 있었다. 조지안의 활기찬 파안대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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